오늘날 '하이힐(High heels)'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고 각선미를 살려주는 현대 여성들의 대표적인 패션 아이템을 떠올립니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하이힐은 세련미와 우아함의 상징과도 같죠.
하지만 이 아찔한 높이의 굽을 가진 신발이, 수백 년 전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마초 남성들의 전유물이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누비던 '전투 장비'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여성들의 발끝으로 오기까지, 하이힐이 거쳐온 기상천외하고도 다소 충격적인 반전 역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니다.
| 하이힐을 신은 여성의 모습(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1.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페르시아 기병들의 비밀 병기
하이힐의 고향은 유럽이 아니라 저 멀리 중동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였습니다. 16세기 이전, 페르시아는 강력한 기병( 말을 타고 싸우는 군인)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때 군인들이 신던 전투화가 바로 하이힐의 시초였습니다.
당시 군인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두 손으로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둘러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말 등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죠.
이때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구두 굽을 뾰족하고 높게 만들어, 말을 탈 때 디디는 발판인 '등자(Stirrup)'에 굽을 쏙 끼우게 한 것입니다. 굽 덕분에 발이 미끄러지지 않고 단단히 고정되자, 군인들은 말 위에서 안정적으로 서서 적들을 향해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즉, 최초의 하이힐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살상과 생존'을 위해 태어난 마초들의 전투 장비였습니다.
2. 똥오줌이 넘쳐나던 중세 유럽: 길거리의 잔혹사
페르시아의 이 독특한 굽 높은 신발은 17세기 초, 외교 사절단을 통해 유럽의 귀족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 도착한 하이힐은 전혀 뜻밖의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하며 대유행을 고하게 됩니다. 바로 중세 유럽 도시들의 지독한 위생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대도시에는 하수도 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요강에 모아둔 인분과 오물을 창밖 길거리에 그대로 던져 버리기 일쑤였죠.
당연히 길거리는 늘 오물과 진흙이 뒤섞인 지저분한 강을 이루었습니다. 펄럭이는 긴 옷과 비단 신발을 신던 유럽의 귀족들에게 길거리의 똥오줌은 재앙과도 같았습니다.
이때 구두 굽을 높여 땅바닥의 오물이 옷자락에 묻지 않도록 도와주는 하이힐(당시에는 '초핀' 혹은 '패턴'이라 불린 높은 받침 신발)이 떠오릅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우아해 보이는 신발이, 가장 더러운 오물을 피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유럽인들의 필수품이 된 것입니다.
3. 절대군주의 은밀한 콤플렉스: 루이 14세와 빨간 굽
하이힐을 유럽 최고의 패션 트렌드로 격상시킨 주인공은 프랑스의 절대군주, '태양왕 루이 14세'였습니다.
"짐이 곧 국가다"를 외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에게도 밤마다 잠을 설치게 하는 치명적인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바로 160cm를 겨우 넘는 작은 키였습니다.
왕의 위엄을 살리고 싶었던 루이 14세는 구두장인에게 명령하여 무려 10cm가 넘는 높은 굽의 구두를 제작해 신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구두 굽을 강렬한 '빨간색'으로 칠하게 했는데, 이는 왕족과 고위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왕을 동경하던 프랑스의 남성 귀족들은 너도나도 왕의 키를 따라잡고 당당해 보이기 위해 높은 굽의 신발을 신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궁정은 높은 굽을 신고 뒤뚱거리며 걷는 남성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던 셈입니다.
| 하이힐을 신은 루이 14세 |
4. 남성의 손을 떠나 여성의 발끝으로 향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마초적이고 권력 지향적이었던 남성들의 신발이 어떻게 여성들의 아이템으로 바뀌게 되었을까요?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유럽 사회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남성들 사이에서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미덕"이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죠. 남성들은 화려한 가발, 스타킹, 그리고 불편한 하이힐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편안한 평평한 구두와 바지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패션 역사에서는 '남성의 위대한 포기(Great Masculine Renunciation)'라고 부릅니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의 당당함과 남성들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의미로 오히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하이힐을 적극적으로 신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남성용 하이힐은 완전히 사라졌고, 여성들의 신발은 더욱 얇고 세련된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스틸레토 힐'과 같은 현대의 하이힐로 완성되었습니다.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끝의 역사
전쟁터의 마초 기병에서 오물을 피하던 귀족, 절대군주의 키 높이 구두를 거쳐 현대 여성의 상징이 되기까지. 하이힐의 연대기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과 고정관념이 시대에 따라 얼마나 쉽게 뒤바뀔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도 "이건 원래 그래", "이건 남성용이야, 이건 여성용이야"라며 스스로 선을 긋고 있는 고정관념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힐이 굽의 높이를 바꾸며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새로 썼듯, 우리의 인생과 가능성 역시 언제든 새로운 방향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신발장 문을 열고 신발을 고르실 때, 타인의 시선이나 정해진 틀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가 가장 당당해질 수 있는 나만의 '스타일과 신념'을 장착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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