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종종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완벽한 대실패'의 탈을 쓰고 찾아오곤 합니다. 앞서 만년필을 만든 워터맨의 이야기나 페니실린을 만든 플레밍의 이야기처럼 말이죠.
오늘 소개해 드릴 주인공 역시 인류의 역사를 바꾼 천재 과학자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그의 위대한 업적은 사실 "시키지도 않은 실험을 하다가 값비싼 실험실 도구들을 엉망진창으로 태워 먹은" 철부지 고등학생 시절의 처참한 대실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세 소년이 실험실에서 저지른 황당한 실수가 어떻게 왕실의 마음을 사로잡고 전 세계 여성을 보라색 열광에 빠뜨렸는지, 더 나아가 현대 의학과 유기화학의 시초가 되었는지 그 눈부신 나비효과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 윌리엄 퍼킨(1838-1907) |
1. 말라리아 치료제를 만들고 싶었던 18세 소년, 윌리엄 퍼킨
때는 1856년, 영국의 런던 왕립화학대학에 다니던 윌리엄 헨리 퍼킨(William Henry Perkin)은 겨우 18세의 나이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사회는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무서운 전염병인 '말라리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일한 말라리아 치료제는 남미에서 자라는 기나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퀴닌(Quinine)'이라는 물질뿐이었는데, 가격이 금값보다 비싸서 일반 백성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온 퍼킨은 자신의 작은 실험실에서 인류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석탄을 태우고 남은 찌꺼기인 '콜타르(Coal tar)'를 이용해 인공적으로 퀴닌을 합성하는 위험하고 복잡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2. 실험실을 뒤덮은 시커먼 찌꺼기, 그 속에서 피어난 보라빛
하지만 18세 소년의 지식과 기술로 화학 분자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며칠 밤을 새우며 약품을 섞던 퍼킨은 결국 분자 구조 조절에 완전히 실패했고, 비커와 시험관 속 물질들은 투명한 치료제 대신 끈적거리고 시커먼 아스팔트 같은 타르 찌꺼기로 변해버렸습니다.
비싼 실험 도구들을 온통 엉망으로 더럽혀 버린 퍼킨은 깊은 한숨을 쉬며 시험관을 닦기 위해 알코올(에탄올)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알코올과 시커먼 찌꺼기가 반응하더니, 비커 전체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영롱한 '보라색 액체'로 투명하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퍼킨은 호기심에 이 보라색 액체에 흰 천 조각을 담가 보았습니다. 그러자 천은 순식간에 매혹적인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아무리 물로 빨고 햇볕에 말려도 그 아름다운 빛깔이 절대 변하지 않고 단단하게 유지되었습니다.
3. 황제와 여왕을 사로잡은 보라색 광풍: '모브(Mauve)'의 탄생
당시 19세기 유럽에서 '보라색'은 아무나 입을 수 없는 극도로 귀한 색이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보라색을 얻으려면 지중해에 사는 수많은 뿔소라 조개를 잡아 신선한 즙을 짜내야 했기 때문이었죠. 평범한 귀족조차 평생 보라색 옷 한 벌 입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습니다.
퍼킨은 자신이 발명한 이 인공 보라색 염료에 야생화의 이름을 따 '모브(Mauve)'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학을 자퇴한 뒤 아버지를 설득해 세계 최초의 인공 염료 공장을 차렸습니다.
결과는 전 세계 패션 역사를 뒤흔들었습니다. 프랑스의 유행을 선도하던 유제니 황후가 공식 석상에 모브빛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역시 자신의 딸 결혼식에 퍼킨의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습니다.
왕실의 선택을 본 유럽의 모든 여성들은 너도나도 보라색 옷을 찾기 시작했고, 런던과 파리의 거리는 순식간에 화사한 보라색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전 세계가 보라색에 중독되었다는 의미로 '모브 광풍(Mauve Measles)'이라고 부릅니다. 18세 소년의 실패작이 신분과 계급을 넘어 누구나 아름다운 보라색 옷을 입을 수 있는 '패션의 민주화'를 이룩한 것입니다.
4. 패션을 넘어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현대 의학으로
퍼킨의 성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석탄 찌꺼기에서 아름다운 색깔을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너도나도 유기화학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빨간색, 파란색 등 수많은 인공 염료가 쏟아져 나왔죠.
그런데 이 염료 연구는 뜻밖에도 인류의 생명을 구하는 현대 의학의 문을 열게 됩니다.
독일의 과학자 파울 에를리히는 퍼킨의 후배들이 만든 인공 염료를 연구하던 중, "특정 염료가 특정 세균의 몸에만 선택적으로 달라붙어 색을 들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치며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세균의 몸에만 달라붙는 염료에 독약을 섞어 주사하면, 인간의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세균만 저격해서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인류 최초의 매독 치료제이자 최초의 화학 요법 제제인 '살바르산'이었습니다. 퍼킨이 실패했던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가, 그의 실패작인 '염료'를 거쳐, 수많은 암 환자와 감염병 환자를 살려내는 현대 의학의 약물 치료(화학 요법)와 제약 산업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 파울 에를리히(1854-1915) |
실패라는 찌꺼기 속에 숨겨진 나만의 빛깔
말라리아 치료제를 만들려다 실패하고 실험실을 온통 까맣게 태워 먹었던 18세 소년 윌리엄 퍼킨. 만약 그가 시커먼 타르 찌꺼기를 보며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에 빨리 버려야지"라며 비커를 깨끗이 씻어버렸다면, 전 세계를 매료시킨 보라색 모브도, 인류를 병마로부터 구한 현대 제약 의학의 발전도 수십 년은 뒤처졌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매 순간 완벽한 성공만을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멋진 성공을 꿈꾸며 야심 차게 시작했던 도전이, 예상치 못한 실수와 오차 때문에 시커먼 타르 찌꺼기처럼 엉망으로 엉겨 붙어 좌절을 안겨줄 때가 훨씬 많죠.
하지만 퍼킨의 비커를 기억하세요. 가장 어둡고 쓸모없어 보이는 실패의 찌꺼기 밑바닥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눈부시고 아름다운 나만의 '보라빛 기적'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했다는 사실에 좌절해 비커를 깨끗이 비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의 잔해에 '왜 그럴까?'라는 탐구의 알코올을 부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유연한 시선입니다. 오늘 당신이 겪은 대실패가, 내일 세상을 바꾸어 놓을 가장 화려한 기적의 시작점일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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